출판 편집자들에게는 너나없이 앓는 지병이 있다. 책상에 너무 오래 앉아 있는 바람에 흔히 걸리는 허리디스크를 우선 들고 싶지만, 오자만 보면 고치고 싶어 하는 교정병도 심각하다. 편집자들끼리는 오자에 대한 이 편집증(偏執症)적 집착을 편집증(編輯症)이라 부르며 낄낄대곤 하는데, 노래방에서 신나게 놀다가도 가사의 오자를 고치려 들 때는 진짜 짜증이 날 정도다. 성격 망치지 않고 이 업계에서 오래 일하려면 ‘육계장’이나 ‘어의없다’ 정도의 흔한 잘못은 눈을 질끈 감고 참자며 스스로 마음을 다독이는 인내심을 키워야 한다.
[산책자]타락한 언어들
틀린 글자 하나에도 전전긍긍하는 편집자들을 패닉에 몰아넣는 방법이 있다. 인터넷에 흔히 떠돌아다니는 말 하나를 편집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외않됀데?” 이 문장을 마주친 편집자 하나는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중병에 걸리고 말았다는 소문이다.
이런 편집자들도 자주 실수하는 취약점이 한두 군데씩 있는데, 내 경우는 ‘섣부르다’와 ‘섯부르다’가 자꾸 헷갈린다. ‘섣부르다’는 ‘이틀-날’의 ㄹ이 ‘이튿날’로 바뀌는 것처럼 접두사 ‘설’이 ‘섣’으로 바뀐 경우다. 이런 이치를 알면 숟가락(술~), 섣달(설~) 같은 맞춤법도 틀릴 일이 없다. 또 ‘묻다’와 ‘뭍다’도 자주 헷갈리는데, 땅에 묻는 경우는 자꾸 ‘뭍는’으로 쓰게 되는 것이다. 땅을 보면 육지, 곧 ‘뭍’이 연상되는 데에 패착의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오자의 원인은 많다. 한번은 모니터에 띄운 원고에서 “우리가 선택할 갈은”이라는 오자를 보고 ‘길’이라고 고치는데 이게 자꾸 ‘갈’로 뜨는 것이다. 그래서 자판을 보며 ㄱ, ㅣ, ㄹ을 또박또박 다시 치는데도 또 ‘갈’로 뜨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모니터에 잡티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제갈!’
물론 편집자들의 이런 직업적 근성은 칭찬할 만한 부분이다. 말과 글을 가지고 오래 씨름해본 사람이야말로 말 무섭고 글 무서운 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젊은 편집자들에게 “오자 하나가 나오면 초판 2000부에 해당하는 오자 2000개가 나온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분발을 촉구하는데, 막상 나 자신의 오자에는 자신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오자와 비문 고치기에 집착하는 편집자가 결국에는 아무 글맛도 없는 무미건조한 모범 문장밖에 쓰지 못하는 병폐에 빠지는 것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단계를 넘어 틀린 문장에서도 생생하게 숨 쉬는 글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수긍하는 예민한 언어 감각은 단어와 글자 하나하나를 머리가 아닌 ‘몸’으로 앓아본 사람만이 키울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 하이데거의 말대로, 존재는 이름을 얻음으로써 우리 앞에 나타나고 우리 역시 언어를 통해서만 존재의 있음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차라리 언어는 존재가 만들어낸 그의 처소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같은 편집자들은 말들이 타락하고 오용되는 현장을 접할 때마다 그런 말을 쓰는 사람들의 타락을 보는 듯해서 더 짙은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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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중요한 정책을 논하는 자리에서 ‘혼’이나 ‘우주의 기운’ 같은 점술가의 표현을 내민 일은 그 저자가 최순실이었건 박근혜였건 이미 지난 일이 되었지만, 말과 표현의 천박한 용례들은 여전히 줄어들 줄 모른다. 공당의 대통령 후보로 당선된 이는 경선 때부터 상대와 거친 말들을 주고받더니 당선 인사에서도 그 인격을 드러내고 만다. 자신은 계파 없는 “독고다이”로 커왔으므로 외국 지도자들과 당당히 “맞짱”을 뜨는 “스트롱맨”이 될 수 있단다. 그는 ‘독고다이’가 자살까지 불사했던 일본 제국군대의 특공대를 말하고 ‘스트롱맨’이 독재자를 뜻한다는 것을 의식했을까?
정치인이나 지식인이 대중의 언어로 말하는 것 자체는 탓할 일이 아니다. ‘통섭’과 ‘20세기 지성사’를 운운하다가 유권자를 가르치려 든다며 비난을 받은 대선 후보자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언어 수준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답시고 대중의 수준을 한없이 저렴한 것으로 끌어내리는 경우는 어찌 보아야 할까. 그에게 대중이란 이렇게 천박하고 저렴한 존재들이라는 인식을 드러내고 싶은 것일까?
베스트셀러였던 <책상은 책상이다>라는 우화소설이 떠오른다. 세상의 상투적인 언어들을 거부하고 혼자만의 말을 쓰다가 결국 말을 잊어버린 사람의 이야기. 작가의 뜻은, 책상은 누구에게나 책상이라는 ‘지시의 약속’을 혼자 거부할 수 없다는 경고를 보내려는 것이었지만, 내가 쓰는 말이 누군가에게 가서 한없이 타락한 모습을 볼 때는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말을 쓰며 혼자 외톨이가 되고 싶은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안희곤 | 사월의책 대표>-경향신문-
[산책자]타락한 언어들
틀린 글자 하나에도 전전긍긍하는 편집자들을 패닉에 몰아넣는 방법이 있다. 인터넷에 흔히 떠돌아다니는 말 하나를 편집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외않됀데?” 이 문장을 마주친 편집자 하나는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중병에 걸리고 말았다는 소문이다.
이런 편집자들도 자주 실수하는 취약점이 한두 군데씩 있는데, 내 경우는 ‘섣부르다’와 ‘섯부르다’가 자꾸 헷갈린다. ‘섣부르다’는 ‘이틀-날’의 ㄹ이 ‘이튿날’로 바뀌는 것처럼 접두사 ‘설’이 ‘섣’으로 바뀐 경우다. 이런 이치를 알면 숟가락(술~), 섣달(설~) 같은 맞춤법도 틀릴 일이 없다. 또 ‘묻다’와 ‘뭍다’도 자주 헷갈리는데, 땅에 묻는 경우는 자꾸 ‘뭍는’으로 쓰게 되는 것이다. 땅을 보면 육지, 곧 ‘뭍’이 연상되는 데에 패착의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오자의 원인은 많다. 한번은 모니터에 띄운 원고에서 “우리가 선택할 갈은”이라는 오자를 보고 ‘길’이라고 고치는데 이게 자꾸 ‘갈’로 뜨는 것이다. 그래서 자판을 보며 ㄱ, ㅣ, ㄹ을 또박또박 다시 치는데도 또 ‘갈’로 뜨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모니터에 잡티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제갈!’
물론 편집자들의 이런 직업적 근성은 칭찬할 만한 부분이다. 말과 글을 가지고 오래 씨름해본 사람이야말로 말 무섭고 글 무서운 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젊은 편집자들에게 “오자 하나가 나오면 초판 2000부에 해당하는 오자 2000개가 나온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분발을 촉구하는데, 막상 나 자신의 오자에는 자신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오자와 비문 고치기에 집착하는 편집자가 결국에는 아무 글맛도 없는 무미건조한 모범 문장밖에 쓰지 못하는 병폐에 빠지는 것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단계를 넘어 틀린 문장에서도 생생하게 숨 쉬는 글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수긍하는 예민한 언어 감각은 단어와 글자 하나하나를 머리가 아닌 ‘몸’으로 앓아본 사람만이 키울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 하이데거의 말대로, 존재는 이름을 얻음으로써 우리 앞에 나타나고 우리 역시 언어를 통해서만 존재의 있음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차라리 언어는 존재가 만들어낸 그의 처소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같은 편집자들은 말들이 타락하고 오용되는 현장을 접할 때마다 그런 말을 쓰는 사람들의 타락을 보는 듯해서 더 짙은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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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중요한 정책을 논하는 자리에서 ‘혼’이나 ‘우주의 기운’ 같은 점술가의 표현을 내민 일은 그 저자가 최순실이었건 박근혜였건 이미 지난 일이 되었지만, 말과 표현의 천박한 용례들은 여전히 줄어들 줄 모른다. 공당의 대통령 후보로 당선된 이는 경선 때부터 상대와 거친 말들을 주고받더니 당선 인사에서도 그 인격을 드러내고 만다. 자신은 계파 없는 “독고다이”로 커왔으므로 외국 지도자들과 당당히 “맞짱”을 뜨는 “스트롱맨”이 될 수 있단다. 그는 ‘독고다이’가 자살까지 불사했던 일본 제국군대의 특공대를 말하고 ‘스트롱맨’이 독재자를 뜻한다는 것을 의식했을까?
정치인이나 지식인이 대중의 언어로 말하는 것 자체는 탓할 일이 아니다. ‘통섭’과 ‘20세기 지성사’를 운운하다가 유권자를 가르치려 든다며 비난을 받은 대선 후보자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언어 수준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답시고 대중의 수준을 한없이 저렴한 것으로 끌어내리는 경우는 어찌 보아야 할까. 그에게 대중이란 이렇게 천박하고 저렴한 존재들이라는 인식을 드러내고 싶은 것일까?
베스트셀러였던 <책상은 책상이다>라는 우화소설이 떠오른다. 세상의 상투적인 언어들을 거부하고 혼자만의 말을 쓰다가 결국 말을 잊어버린 사람의 이야기. 작가의 뜻은, 책상은 누구에게나 책상이라는 ‘지시의 약속’을 혼자 거부할 수 없다는 경고를 보내려는 것이었지만, 내가 쓰는 말이 누군가에게 가서 한없이 타락한 모습을 볼 때는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말을 쓰며 혼자 외톨이가 되고 싶은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안희곤 | 사월의책 대표>-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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