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아시다시피 세상에는 구멍의 종류가 퍽 많다. 남산에 피어난 진달래를 보다가 터널로 들어갈 때, 두 개의 구멍은 사람의 얼굴에 난 콧구멍 같았다. 불가에서는 인중에 마음을 얹어두고 들숨과 날숨을 관찰하는 것을 수행의 한 방편으로 삼기도 한다. 신심 깊은 이라면 이 컴컴한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이곳을 수행처로 삼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던 차에 <변호인>에서 돼지국밥을 맛있게 끓여내던 여배우가 세상을 떠났다는 안타까운 뉴스를 접했다. 이제 허공으로 돌아간 그이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했다. “연기는 나의 숨구멍이었어요.”
나란한 것 같지만 월화수목금토일은 등고선 같아서 아무 때나 비상구를 만들 수가 없다.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겨우 몸을 빼내어 떠난 주말의 꽃산행. 남해 망운산 초입에서 땅에 떨어진 꽃잎과 작은 제비꽃을 보았다. 산에 드나든 지가 제법 되었지만 아직 모르는 나무와 야생화가 너무 많다. 산에서 모르는 나무 앞에 서면 꼭 그 나무 형상의 구멍을 만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언제쯤 나는 저 무수한 구멍들을 퐁퐁퐁 다 터뜨려 후련하게 통할 수 있을까.
땅에 떨어져 편안히 누운 꽃잎을 보면 어쩐지 예쁜 구멍, 지하로 가는 문(門)이라는 생각이 든다. 꽃잎에 둘러싸인 작은 꽃은 고깔제비꽃이었다. 제비꽃은 종류가 아주 많다. 꽃줄기가 뿌리에서 바로 나오느냐, 원줄기에서 나오느냐로 크게 구별된다지만 색깔, 털, 잎 모양 등에서 언제나 헷갈린다. 고깔제비꽃은 잎이 또르르 말리는 게 특징인데 오늘따라 그게 유난히 작은 구멍으로 도드라져 보였다. 고깔 같은 잎이 만들어내는 작은 구멍 옆에 쪼그리고 앉아 나를 둘러싼 여러 구멍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고깔제비꽃, 제비꽃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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