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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두려움에나 뛰는 가난한 심장



경남 창원에 가면 그 산, 백월산이 있다. 높은 산은 아니지만 봉우리들이 빼어나다. 백월이라는 그 이름은 흰 달이 비추는 달밤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운 것은 모두 백월에 있다는 듯. 가까워도 다가갈 수 없고, 다가갈 수 없어도 가깝다 느끼는 그 거리(距離)에 그리움이 있다. 그리움이란 무엇인가. 더구나 백월이 뜨는 날 호수에 비치는 산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그것은 내 마음에 달이 들어, 백월이 들어 내 마음의 산을 찾게 하는 힘이 아닐까. 삼국유사는 그 백월산에 두 명의 현자(賢者)가 살았다고 전한다. 부러울 것 없는 황제가 찾고자 한 그 산은 이름도 특이한 박박과 부득이라는 현자를 낸 산, 현자의 산이다.

아마 황제는 자신이 가진 엄청난 권력으로 인해 날마다 외로웠을 것이었다. 그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신하나 자식들 때문에 늘 화를 낼 준비를 하고 있고, 화를 내고 나면 쩔쩔매거나 달라지는 군상(群像)을 보면서 권력의 화신이 된 자기 옆에는 아무도 없음을 알아차렸을지 모르겠다. 그럴 때는 하늘을 보고 산을 찾아야 한다. 불안과 불신과 분노에 흔들리는 내 마음의 중심을 찾아, 마음 깊숙한 호수에서 빛나는 산을 찾아 방랑할 준비를 해야 한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방랑하는 자이자 산을 오르는 자다. 내 어떤 숙명을 맞이하게 되든, 내 무엇을 체험하게 되든 그 속에는 반드시 방랑과 산 오르기가 있으리라.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을 체험하기 마련이니."

미디안이란 사막 지역에서 "나, 낯선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라고 탄식하며 방랑의 40년을 보낸 모세가 떨기나무의 불꽃으로 나타난 신을 만난 곳도 산이었고, 십계명을 받은 곳도 산이었다. 모세가 지녔던 영성(靈性)의 원천은 산이다. 그것은 그가 아멜렉족과 싸울 때도 드러난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알렉산더처럼, 칭기즈칸처럼, 나폴레옹처럼 앞서서 나가 싸우지 않았다. 젊은 날 나는 그것이 이상했다. 전쟁 중인데 지도자가 산 위에 올라가 기도나 하다니. 그런데 지금은 그런 모세가 좋다. 모세가 가진 힘의 원천은 산에 올라 기도하는 것이었다. 모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렵고 시끄러운 상황일수록 부동(不動)의 중심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운 것들은 산에서 오고, 백월이 뜨는 밤하늘에서 온다. 현대인은 그 밤을 잃어버렸다. 달밤에 소곤거리는 풀벌레 소리를, 실개천이 휘돌아나가는 물소리를, 달을 보고 기원하는 소녀의 청명한 눈동자를, 그 소녀를 사랑해서 밤새 말을 달려온 소년의 멈출 수 없는 심장을 잃었다.

안으로부터 올라오는 기쁨에는 뛰지 않고 두려움에나 뛰는 가난한 심장을 가만히 지켜보면 거기, 갈 곳을 잃고 피곤에 지친 누군가가 있다. 그때는 산에 오르자, 밤하늘을 보자. 추석 보름을 기다리며 매일매일 달을 보자, 그리운 것들은 하늘에서 오고 밤하늘에 빛난다.
-조선일보-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