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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은메달리스트는 슬퍼하고 동메달리스트는 기뻐한다는 심리 연구


이봉주가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마라톤에서 남아공의 투과니에 3초 뒤진 은메달을 땄다. 결승선이 있는 스타디움에서 메달 색이 결정된 명승부였다. 언론은 '2위에 그쳐 분루(憤淚)를 삼켰다'고 전했다. 이봉주도 "100m만 더 있었으면…" 하며 고개 숙였다. 세상에서 두 번째로 잘 달린 선수가 '금을 따지 못한 죄인'이 됐다. 올림픽 시상식마다 한국 선수들은 울보가 된다. 금을 따면 감격해 울고, 은이나 동을 따면 금을 못 딴 아쉬움에 울었다.


▶은메달리스트는 슬퍼하고 동메달리스트는 기뻐한다는 심리 연구가 있다. 미국 노스웨스턴대학 연구팀이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시상식 사진을 일반인에게 보여주고 표정으로 '행복도' 점수를 매겨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은메달리스트들 표정에선 기쁨보다 아쉬움이 더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2위는 '조금 더 잘했더라면 금을 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부정적 생각에 빠지기 쉽지만 3위는 최소한 메달은 건졌다는 안도감을 갖는 경향이 많다.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한국은 8개의 은메달을 땄다. 금메달은 5개, 동메달은 4개였다. 그런데 한국 은메달리스트들이 이렇게 다들 기뻐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 메달 색깔에 연연하는 대신 최선을 다한 자신의 모습에 자부심을 가졌다. 컬링 신드롬을 일으킨 여자 선수들은 "우리나라에 컬링을 알리게 돼 행복했다"며 웃었다. 스노보드 이상호와 봅슬레이 4인조는 "꿈 같은 일" "상상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며 환호했다. 3연패를 놓친 이상화도 금메달을 딴 일본 선수 고다이라와 우정을 나누는 멋진 장면을 보여줬다.


▶한국은 죽기 살기로 경쟁하는 사회다. 1등부터 꼴찌까지 서열을 매겨 놓고 온 사회가 1등만 치켜세운다. 한국처럼 전국 대학이 성적을 갖고 순위가 매겨진 나라가 또 있을까. 국회의원 선거 제도도 1등만 가린다. 2등이나 꼴찌가 같다. 1등 못하면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사회인 것이다.


▶평창올림픽에선 은메달 딴 선수만 아니라 아예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까지 밝게 웃었다. 국민도 올림픽 무대를 향해 4년간 피땀 흘려온 사실만으로도 선수들에 박수를 보냈다. 이번 올림픽은 한국의 '1등 도시' 서울이 아닌 평창·강릉·정선 같은 지방 작은 도시들에서 열렸다. 제대로 치를 수 있겠느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성공적이었다. 승자를 가려내는 일도 중요하지만 참가한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축제의 모습에서 더 성숙해진 한국 사회를 보았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