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안식년으로 교토대학에 체류할 때의 일이다. 대학 구내식당에 가보니 몇몇 식탁의 한가운데에 칸막이가 쳐져 있었다. 식탁 양쪽에서 학생들이 칸막이벽을 마주하고 각자 우적우적 밥을 먹고 있는 것이었다. 면벽참선도 아니고, 면벽식사라! 하도 기이해서 일본인 교수에게 연유를 물어봤다. 대답인즉, 모르는 사람과 눈 마주치는 게 싫어 화장실에서 식사하는 학생들이 늘어나, 대학당국이 이런 조치를 내놨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일본 사회가 우리보다 훨씬 더 개인주의적이라고 말한다. 혼자 밥 먹고 술 마셔도 이상하게 보는 사람 없고, 기괴한 복장으로 거리를 활보해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다고…. 우리보다 훨씬 ‘개인의 자유’를 존중한다고. 그러나 이건 큰 오해다.
[역사와 현실]한국의 개인, 일본의 개인
사회나 공동체보다 개인을 우위에 두고, 사회에 대한 개인의 비판, 저항, 이탈을 용인하는 것을 개인주의라고 한다면, 일본은 개인주의가 매우 희박한 사회이다. 소속집단보다 개인이 더 우선한다고 생각하는 보통의 일본인은 거의 없을 것이며, 집단을 상대로 대의 혹은 자기이익을 내걸고 투쟁하는 개인도 드물다. 우선 일본사람들은 말수가 적으며, 입을 열어도 자기주장을 하려는 게 아닌 경우가 많다. 주변공기를 읽고서 그에 맞춰 말한다(분위기 파악이라는 일본말은 ‘空氣を讀む’, 즉 공기를 읽는다이다). 한국에서 분위기 파악 못하면 핀잔 좀 받는 데 그치지만, 일본서 공기를 읽지 못하면 진지하게(!)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아웃된다.
이런 사회에서 한 개인이 사회를 상대로 도도하게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거나, 사회 전체의 원리를 비판하며 그것을 초월하려는 행동이나 발상은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회가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모두가 모두를 배려 혹은 의식하며 질서와 규율을 지키고, 공동의 이익(예를 들면 국익)을 추구하기에 용이하다. 그 속에서 터져 나올 수 있는 긴장과 반발의 에너지를 무마하는 장치가 ‘고립의 허용’이다. 개인이 집단에 저항하여 집단전체의 원리를 왈가왈부하는 것은 용서하지 않지만, 그 원리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나는 따로 살겠다하는 사람들을 용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집단 전체의 원리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 안에서이다. 교토대학생들이 면벽식사를 하도록 배려해주고, 어떤 친구가 도깨비 같은 패션으로 지하철을 타도 간섭하거나 나무라지 않는 것은 개인주의가 아니라 ‘고립허용주의’이다(오타쿠는 사회에 당당하게 발언하는 ‘개인’들이 아니라, 허용된 고립의 공간에서 뛰노는 존재들이다).
이른바 ‘근대화’ 초기의 일본 지식인들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20세기 초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역사가 야마지 아이잔(山路愛山·1865~1917)은 중국과 일본을 비교한 글에서 중국 사회를 “개인주의의 극단”이라고 했다. 반대로 일본은 개인주의가 없으며 이상적인 공동생활을 하는 사회라고 자랑스럽게 주장했다(<日漢文明異同論>). 실제로 많은 연구들은 일본은 공동체의 성격이 강해서, 각 개인은 자기가 속한 집단이나 단체에 의존적인 반면에, 중국 사회는 각각의 개인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콴시(관계)가 네트워크처럼 얽혀 있어, 활동범위나 일의 성패는 각 개인의 역량에 많이 달려 있다고 지적한다(훼이샤오통, 이경규 번역 <중국사회의 기본구조>).
-경향신문-
우리는 흔히 일본 사회가 우리보다 훨씬 더 개인주의적이라고 말한다. 혼자 밥 먹고 술 마셔도 이상하게 보는 사람 없고, 기괴한 복장으로 거리를 활보해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다고…. 우리보다 훨씬 ‘개인의 자유’를 존중한다고. 그러나 이건 큰 오해다.
[역사와 현실]한국의 개인, 일본의 개인
사회나 공동체보다 개인을 우위에 두고, 사회에 대한 개인의 비판, 저항, 이탈을 용인하는 것을 개인주의라고 한다면, 일본은 개인주의가 매우 희박한 사회이다. 소속집단보다 개인이 더 우선한다고 생각하는 보통의 일본인은 거의 없을 것이며, 집단을 상대로 대의 혹은 자기이익을 내걸고 투쟁하는 개인도 드물다. 우선 일본사람들은 말수가 적으며, 입을 열어도 자기주장을 하려는 게 아닌 경우가 많다. 주변공기를 읽고서 그에 맞춰 말한다(분위기 파악이라는 일본말은 ‘空氣を讀む’, 즉 공기를 읽는다이다). 한국에서 분위기 파악 못하면 핀잔 좀 받는 데 그치지만, 일본서 공기를 읽지 못하면 진지하게(!)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아웃된다.
이런 사회에서 한 개인이 사회를 상대로 도도하게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거나, 사회 전체의 원리를 비판하며 그것을 초월하려는 행동이나 발상은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회가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모두가 모두를 배려 혹은 의식하며 질서와 규율을 지키고, 공동의 이익(예를 들면 국익)을 추구하기에 용이하다. 그 속에서 터져 나올 수 있는 긴장과 반발의 에너지를 무마하는 장치가 ‘고립의 허용’이다. 개인이 집단에 저항하여 집단전체의 원리를 왈가왈부하는 것은 용서하지 않지만, 그 원리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나는 따로 살겠다하는 사람들을 용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집단 전체의 원리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 안에서이다. 교토대학생들이 면벽식사를 하도록 배려해주고, 어떤 친구가 도깨비 같은 패션으로 지하철을 타도 간섭하거나 나무라지 않는 것은 개인주의가 아니라 ‘고립허용주의’이다(오타쿠는 사회에 당당하게 발언하는 ‘개인’들이 아니라, 허용된 고립의 공간에서 뛰노는 존재들이다).
이른바 ‘근대화’ 초기의 일본 지식인들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20세기 초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역사가 야마지 아이잔(山路愛山·1865~1917)은 중국과 일본을 비교한 글에서 중국 사회를 “개인주의의 극단”이라고 했다. 반대로 일본은 개인주의가 없으며 이상적인 공동생활을 하는 사회라고 자랑스럽게 주장했다(<日漢文明異同論>). 실제로 많은 연구들은 일본은 공동체의 성격이 강해서, 각 개인은 자기가 속한 집단이나 단체에 의존적인 반면에, 중국 사회는 각각의 개인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콴시(관계)가 네트워크처럼 얽혀 있어, 활동범위나 일의 성패는 각 개인의 역량에 많이 달려 있다고 지적한다(훼이샤오통, 이경규 번역 <중국사회의 기본구조>).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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