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국가 지도자가 선조들이 피와 땀으로 이룩한 역사를 뒤엎고 새로 만들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힐 때

오리지널마인드 2017. 3. 9. 07:42
지난해 6월 '다른백년'이라는 지식인단체가 출범했다. 운동권 출신의 학자·언론인·시민운동가 등이 만든 것으로 갑오개혁 이후 우리가 추진해온 발전 방식이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며 '경로 변경'을 모색한다고 했다. 정권 교체만으로는 산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이제까지와는 다른 모델로 앞으로 백년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백년은 강요된 식민지적 근대화, 서구 따라잡기, 국가주의의 시대였다"는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의 말에서 이들의 문제의식과 지향을 읽을 수 있다.

올해 초엔 한 진보 좌파 언론이 '박정희와의 이별'을 주창하고 나섰다. 이들은 재벌 경제·지역주의·노동 탄압·땅 투기 등 '헬조선'을 만든 주요 요인이 박정희 시대에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령'을 그 딸인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정희 체제와는 '다른 오십년'의 수립을 국가 과제로 제시한 셈이다.

최순실 사태로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 운영이 중단되고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야권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국가 개조'를 부르짖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진보 좌파 대선 후보들은 '적폐(積弊) 청산'을 위한 방안을 앞다퉈 내놓고, 보수 우파 후보들은 이들에게 뒤질세라 '개혁'을 소리 높여 외친다. 바야흐로 '개혁' '개조' '청산'의 백화제방(百花齊放) 시대다.

집권을 목전에 뒀다고 생각하는 야권 후보들이 국정 포부를 밝히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이 집권할 오년뿐 아니라 그다음 정권까지 내다보며 '다른 십년'을 구상하는 것은 국가정책의 지속성을 고려할 때 권장할 만하다. 사회경제 시스템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면 국가 수준을 높이고 시대 흐름에 맞춰 '다른 오십년'을 설계하는 것도 탓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청산' 대상이 국가의 골격인 역사 정체성까지 미친다면 문제가 다르다.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후보는 얼마 전 펴낸 '대한민국이 묻는다'라는 책에서 '역사 교체'를 주장했다. 그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주역들에게 "친일에서 반공으로, 또는 산업화 세력으로, 지역주의를 이용한 보수라는 이름으로 변신한 위선적인 허위 세력"이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반면 안희정 후보는 3·1절 기념행사에서 "지난 백년 역사 속에 김구도, 이승만도, 박정희도, 김대중도, 노무현도 있다. 그들 모두가 대한민국"이라고 했다. 그는 또 "지난 백년의 역사를 국민의 관점에서 자긍심을 갖고 받아들이는 게 대통합이고, 앞으로 백년을 국민이 함께 설계하는 것이 '시대 교체'"라고 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라보는 두 유력 대선 후보의 관점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다.

지식인들이 담론으로 '다른 백년'을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런 논의는 역사를 보는 안목을 넓히고 미래 구상을 풍부하게 만든다. 이들이 우리 역사의 성취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가 지도자가 선조들이 피와 땀으로 이룩한 역사를 뒤엎고 새로 만들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힐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소름 끼치게 보여주었다. 시대는 교체되지만 역사는 교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위에 새로운 역사를 쌓아갈 뿐이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