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소련을 무너뜨리고 냉전을 끝낸 게 팩스(fax)냐, 달러냐, 고르바초프냐 논쟁이 붙었다. 비공인 정답은
오리지널마인드
2017. 9. 30. 09:16
중·고생 때 성인 잡지 '플레이보이'는 멀리서 들리는 음습한 사이렌 같았다. 시골 까까머리도 그 이름은 알았다. 채 여물지 못한 욕망으로 뒤척이던 어린 수컷끼리 숙덕댔지만 쉽게 손에 넣지는 못했다. 그러다 한 청소년 단체 모임 덕에 네 시간 걸려 서울 구경을 왔다. 서울내기 또래가 슬쩍 보여준 플레이보이는 숫제 불덩이였다. 상상 이상이었다. 완전히 벗은 성인 여자의 몸 사진을 처음 봤다. 얼굴이 얼어붙듯 했다가 다시 화끈거렸다. 그걸 구한다는 세운상가라는 이름이 머리에 와 박혔다. 군 복무 땐 이 잡지의 핀업걸 사진을 철모 속에 넣어 다니던 병사도 보았다.
▶엊그제 아흔한 살로 세상 뜬 휴 헤프너는 스물일곱에 이 잡지를 창간했다. 6·25전쟁이 포화를 멈춘 해였다. 돈은 모친이 댔다. 그 뒤 64년. 미녀 아방궁을 호령하며 여성 1000명과 관계했다는 헤프너도 관(棺) 속에 누웠다. 묘비명에 '성(性)에 대한 유해하고 위선적인 생각을 바꾸는 데 기여했다'고 썼다. 정말 인간 위선을 벗겨 내고 성 혁명을 이루는 데 공헌했을까. 수컷 인간이 가진 욕망을 상업적으로 자극해서 돈 버는 데 성공한 출판 자본주의의 표상일까.

▶소련을 무너뜨리고 냉전을 끝낸 게 팩스(fax)냐, 달러냐, 고르바초프냐 논쟁이 붙었다. 비공인 정답은 플레이보이다. 공산 체제의 위선을 깨는 데 플레이보이 역할이 컸다. 소련은 1964년 이 잡지 기자에게 입국을 허락했다. UPI통신은 '소련 당국이 문화에 기여한다는 조건으로 기자 입국과 취재를 허락했다'고 썼다. '여성 마흔 명을 찍었는데 학생과 비즈니스걸이었고 일부는 누드였다'고 했다. 문화 기여는 모르겠지만, 20년 뒤 동구권 장벽에 구멍을 낸 측면은 있다.
▶까까머리를 면하고 나서 플레이보이를 제대로 봤다. 카투사 친구를 면회 갔다 병사 식당에 놓인 플레이보이를 보고 놀란 적도 있다. 종이 질이 워낙 좋아서 한 제지 공장에 가면 이 잡지 과월호가 재생용으로 쌓여 있다는 말도 들었다. 러셀과 사르트르를 인터뷰하고, 헤밍웨이, 업다이크, 하루키의 소설이 실리는 잡지이기도 했지만 남들 앞에서 펼쳐보진 못했다.
▶1953년 플레이보이 창간호는 '핵 시대의 불안을 조금이나마 없애준다면 우리 존재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썼다. 한국은 90년대 우리말 발행을 불허했다. '국민정신 위생'을 염려했던 때문이었다. 이제 한반도가 핵 위기에 내몰린 올가을 한국어판이 나왔다. 그때 젊은이 헤프너는 핵 불안을 잊게 해주려 플레이보이를 냈는지 몰라도 지금 우리는 그럴 처지도 아닌 것 같아 씁쓰레하다.
-조선일보-
▶엊그제 아흔한 살로 세상 뜬 휴 헤프너는 스물일곱에 이 잡지를 창간했다. 6·25전쟁이 포화를 멈춘 해였다. 돈은 모친이 댔다. 그 뒤 64년. 미녀 아방궁을 호령하며 여성 1000명과 관계했다는 헤프너도 관(棺) 속에 누웠다. 묘비명에 '성(性)에 대한 유해하고 위선적인 생각을 바꾸는 데 기여했다'고 썼다. 정말 인간 위선을 벗겨 내고 성 혁명을 이루는 데 공헌했을까. 수컷 인간이 가진 욕망을 상업적으로 자극해서 돈 버는 데 성공한 출판 자본주의의 표상일까.

▶소련을 무너뜨리고 냉전을 끝낸 게 팩스(fax)냐, 달러냐, 고르바초프냐 논쟁이 붙었다. 비공인 정답은 플레이보이다. 공산 체제의 위선을 깨는 데 플레이보이 역할이 컸다. 소련은 1964년 이 잡지 기자에게 입국을 허락했다. UPI통신은 '소련 당국이 문화에 기여한다는 조건으로 기자 입국과 취재를 허락했다'고 썼다. '여성 마흔 명을 찍었는데 학생과 비즈니스걸이었고 일부는 누드였다'고 했다. 문화 기여는 모르겠지만, 20년 뒤 동구권 장벽에 구멍을 낸 측면은 있다.
▶까까머리를 면하고 나서 플레이보이를 제대로 봤다. 카투사 친구를 면회 갔다 병사 식당에 놓인 플레이보이를 보고 놀란 적도 있다. 종이 질이 워낙 좋아서 한 제지 공장에 가면 이 잡지 과월호가 재생용으로 쌓여 있다는 말도 들었다. 러셀과 사르트르를 인터뷰하고, 헤밍웨이, 업다이크, 하루키의 소설이 실리는 잡지이기도 했지만 남들 앞에서 펼쳐보진 못했다.
▶1953년 플레이보이 창간호는 '핵 시대의 불안을 조금이나마 없애준다면 우리 존재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썼다. 한국은 90년대 우리말 발행을 불허했다. '국민정신 위생'을 염려했던 때문이었다. 이제 한반도가 핵 위기에 내몰린 올가을 한국어판이 나왔다. 그때 젊은이 헤프너는 핵 불안을 잊게 해주려 플레이보이를 냈는지 몰라도 지금 우리는 그럴 처지도 아닌 것 같아 씁쓰레하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