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1980년 봄 광주는 평화로웠다

오리지널마인드 2017. 4. 5. 11:41
1980년 봄 정권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던 그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겠지만, 광주는 평화로웠다. 동물원 캥거루와 사슴은 순산했고, 광주일고와 광주상고가 대통령배 고교야구 결승전에 올랐다. 결승전이 치러지는 날, 광주 시내는 두 학교를 응원하는 이들의 노랫소리와 함성으로 들썩였다.

그해 봄날 육상 선수였던 열세 살 소녀도 광주에 있었다. 전남 곳곳에서 뽑힌 선수들은 3개월째 광주 시내에 있는 감독집에서 합숙하고 있었다. 선수들은 아침마다 열을 지어 구호를 외치면서 양동시장을 가로질러 공설운동장으로 뛰어갔다. 소녀는 장사를 준비하며 자신들을 힐긋대던 상인들의 모습과 광주천 위를 낮게 날아다니던 흰 새들을 기억한다.

어느 날 느닷없이 감독과 코치는 아이들이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했다. 훈련도 방 안에서 했고, 방 창문에는 두꺼운 솜이불을 쳐놓았다. 헬기가 날아다니고 군인들이 열을 맞춰 뛰어가는 모습이 장독대에서 보였다. 아이들은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훈련받다 인대가 늘어났는데도 치료를 못 받고 있었어요. 며칠 지나고 병원에 가는데, 도청 앞 길바닥에 흰 천을 덮어 놓은 게 죽 늘어서 있었어요.”

소녀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코치가 바들바들 떠는 게 이상할 뿐이었다. 소녀는 다리를 치료받았고, 6월에 소년체전에 출전했다. 정부는 뻔뻔하게 광주에 있던 전남 선수단까지 데려가 소년체전을 열었다. “우리 선수단이 원주까지 기차를 타고 갔대요?” 그의 망각은 다행이다. 봄을 빼앗긴 이들의 기억이 희미해져 아픔이 치유된다면 망각은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가해자의 망각은 죄악이다. 가해자는 기억해야 한다. 자신이 저지른 일 하나하나를.
<김해원 | 동화작가>-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