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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매뉴얼의 나라' 일본은 '도쿄 방재'만 해도 338쪽 분량에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치밀하게 담고 있다

최근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과 경남 밀양 세종병원 화재 사고의 운명을 가른 건 '매뉴얼'이었다. 밀양에선 불이 나면 엘리베이터를 타면 안 된다는 상식이 무색하게 엘리베이터 안에서 6명이 숨졌다. 세브란스는 달랐다. 매뉴얼을 만들어 놓고 모의 훈련을 통해 이를 틈틈이 체화(體化)함으로써 피해를 크게 줄였다.

세브란스병원의 화재 발생시 매뉴얼을 보면 병동별·층별로 대피 경로를 분류한 다음 '1차 화점(火點) 반대편 ○○로 이동→2차 연결 통로인 ○○로 이동→6층 ○○로 이동', 이런 식으로 구체적으로 안내한다. 엘리베이터 이용도 화재 시 탑승 금지' 수준을 넘어 '화재가 발생하면 정지하는 층에서 즉시 내려 계단으로 대피'처럼 상황별로 나눴다. 여러 전문가가 "국내 병원 가운데 이 정도 갖춘 곳이 없다"고 칭찬할 정도다.

하지만 '매뉴얼의 나라' 일본은 몇 수 위다. 유명한 지진 대처 매뉴얼 '도쿄 방재'만 해도 338쪽 분량에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치밀하게 담고 있다.

'(지진 발생 시) 엘리베이터 안에 있을 땐 모든 층 단추를 다 눌러 가장 먼저 열린 층에 내린다' '생수는 4인 가족 기준 2L(리터) 12~30병을 확보할 것'….

일본 도쿄에서 대규모 지진 발생에 대비한 대피 훈련이 시작되자 백화점에 있던 시민들이 재난시 행동요령에 따라 일제히 몸을 낮추고 있다. 이번 훈련은 규모 7.3의 지진 발생을 가정해 도쿄 도심에서 진행됐다. /AP 뉴시스

재난(災難) 매뉴얼만이 아니다. '무지(MUJI)' 브랜드로 국내에도 진출해 있는 생활용품 기업 무인양품(無印良品)은 '무지그램'이란 '매뉴얼'을 운용한다. 경영 팁(tip)부터 상품 개발, 매장 디스플레이, 접객 등 거의 모든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고 관리해야 하는지 2000쪽 분량에 달한다.

'상품을 단정하게 진열한다'처럼 추상적인 지시는 일절 없고 '페이스 업(face up·가격표가 붙은 면이 정면을 향하게), 선(線)과 간격을 일정하게'라고 적고 실제 사례 사진들을 붙여놓았다. 상사가 부하에게 야단칠 때와 관련해 '주의를 주거나 꾸중할 때는 반드시 두 사람만 있는 때를 고른다' '열린 공간이 아니라 회의실 등 별도 공간에서 말하는 게 바람직하다' 같은 매뉴얼도 있다.

'대화할 때 팔이나 다리를 꼬지 않는다' '상대가 서 있을 때는 서고, 앉아 있을 때는 앉는다…'. 별걸 다 간섭한다 싶은 측면도 있지만 '무지그램'은 현장에서 축적한 모든 임직원의 지혜와 성공·실패 사례를 공유하는 장(場)이다. 새 제안과 수정 사항을 반영해 매월 매뉴얼을 업데이트해 참신함을 유지하는 것도 매력이다. 덕분에 무인양품의 생산성은 업계 최고 수준이며, 올 들어 시가총액 1조엔(약 9조8000억원)을 돌파했다.

물론 매뉴얼에만 의존하다가 돌발 상황 임기응변에 무력한 수동형 조직원을 양산할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매뉴얼 만성 결핍'에 시달리는 우리가 할 말은 아닐 것 같다.
-만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