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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무술옥사'(戊戌獄事)라 할 만하다?

선조 때인 1589년 황해도관찰사가 비밀 보고서를 올렸다. 동인(東人) 정여립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갈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정여립은 자살했지만 그와 같은 당파 사람들이 줄줄이 잡혀와 심문받고 처형됐다. 사건 조사를 맡은 이가 서인인 정철이었다. 실체도 불분명한 이 사건으로 1000명 넘게 죽어나갔다. '기축옥사'(己丑獄事)다. 

▶적장자(嫡長子)가 아니면서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정통성 시비에 휘말렸다. 광해군을 지지한 신하들은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옹호한 반대파를 제거하려 했다. 일반 살인 강도죄로 잡혀온 일당을 심문하다 사면을 미끼 삼아 허위 자백을 시켰다. '영창대군 장인인 김제남과 함께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영창대군 어머니인 인목대비까지 끌어들여 대비 자격을 박탈했다. '폐모살제'(廢母殺弟)의 비극을 부른 '계축옥사'(癸丑獄事)였다. 

▶'내가 만약 학문을 하지 않고 글도 몰랐다면 이런 일이 있었겠소?' 서른한 살에 김해에 귀양간 문인 이학규는 23년 유배 생활 동안 어머니와 아내, 어린 두 자식을 모두 잃고 탄식했다. 정조 사후 노론 벽파는 천주교 신자가 많은 남인을 숙청하기 위해 옥사를 일으켰다. 신유옥사(辛酉獄事)는 결국 세도정치로 이어져 망국(亡國)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 

▶그제 구속 기소된 이명박 전 대통령이 페이스북에 '옥중입장문'을 올렸다. 이 전 대통령은 "댓글 관련 수사로 조사받은 군인과 국정원 직원 200여명을 제외하고도 청와대 수석, 비서관, 행정관 등 100명 넘는 사람이 검찰 조사를 받았다. '무술옥사'(戊戌獄事)라 할 만하다"고 했다. 올해가 무술년이다. 박근혜 정부 적폐 수사로 기소된 고위 공무원과 기업인,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 주변 인사만 40명 가깝고, 1심에서 선고된 실형 형량을 합하면 110년 정도다. 이명박 정부 적폐 수사로 기소됐거나 기소 예정인 사람 숫자도 엇비슷하다. 

▶조선시대 정권 교체는 역모(逆謀)를 조작하거나 고변(告變)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곤 어김없이 피바람 섞인 옥사가 이어졌다. 보복이 보복을 부르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연려실기술'을 쓴 18세기 실학자 이긍익은 이런 당파 싸움을 두고 "암까마귀와 수까마귀를 가리기 어려운 것과 같고 솥 밑과 가마 밑이 서로를 흉보는 것과 같다"고 개탄했다. 그가 21세기의 대한민국을 보고는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조선일보-

사필귀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