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소비시대의 최고신인 ‘지름신’은 신자들에게 어떤 윤리적 계율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 신을 모시는 신전에 들어가기 위해서 ‘투명봉투’ 따위에 넣을 헌금을 미리 준비해 둘 필요는 없다. 신전의 문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으며, 그 안에서는 아무도 양심을 긁는 따분한 설교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신의 전도사들은 어디에나 출입하며 겸손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교리를 설파한다. 거실의 TV 화면도, 영화관의 스크린도, 컴퓨터 모니터와 스마트폰의 액정화면도, 심지어 대중교통 수단 내부의 벽면도 ‘지름신교’ 전도사들의 활동 무대다.
‘사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인간들의 합리적 선택이 시장을 확대, 발전시키며, 시장의 발전이 곧 역사의 진보’라고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담론은, 지름신교의 권위 있는 교리 해설이다. 이 교리에 따르면, 시장에 대한 공적 개입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 섭리에 위배되는 일이다. 이제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소유하려는 욕망에 드리워졌던 죄의 그늘은 사라졌다.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더 쓸 수 있는 물건을 버리면서 죄책감이나 미안한 마음을 갖는 현대인은 거의 없다. “내 돈 내 맘대로 쓰는 데 남이 무슨 상관이냐?”, “있는 사람들이 펑펑 써 줘야 가난한 것들에게도 떨어지는 게 있다” 등의 말들이, 지름신교의 교리를 알기 쉽게 전달하는 대중적 기도문이다.
신은 언제나 영생불멸, 전지전능, 지고지선의 속성을 갖춘 존재였다. 그런데 현대의 지름신은 이들 중 ‘지고지선’이라는 거추장스러운 권능을 떼어내 버렸다. 이 신은 헌금하는 자에게 헌금하는 만큼만 은총을 베푸는 ‘공평한’ 신이다. 지름신교의 신자들에게 다른 신들이 금기시했던 탐욕, 사치, 오만 등은 더 이상 ‘악덕’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자기 사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교리에 합당한 ‘합리적’ 행위이다.
사익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현대의 ‘지름신교’ 교도들에게 천벌은 무의미하다. 그들에게는 ‘공동체’나 ‘공익’을 전제로 구축된 ‘죄악’에 대한 개념조차 없다. 지름신교의 교세가 커지는 만큼 모든 것, 심지어 공동체가 위임한 권력까지 사유화하여 사익을 극대화하려는 파렴치한 욕망이 자리 잡을 공간은 더 넓어질 것이다. 공동체의 파멸을 막고, 지름신에게 버림받은 가여운 영혼들에게 안식할 처소를 마련해 주기 위해서는, 이 ‘사이비 종교’와 결별할 방도를 찾아야 한다.
-경향신문-
그러나 이 신의 전도사들은 어디에나 출입하며 겸손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교리를 설파한다. 거실의 TV 화면도, 영화관의 스크린도, 컴퓨터 모니터와 스마트폰의 액정화면도, 심지어 대중교통 수단 내부의 벽면도 ‘지름신교’ 전도사들의 활동 무대다.
‘사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인간들의 합리적 선택이 시장을 확대, 발전시키며, 시장의 발전이 곧 역사의 진보’라고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담론은, 지름신교의 권위 있는 교리 해설이다. 이 교리에 따르면, 시장에 대한 공적 개입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 섭리에 위배되는 일이다. 이제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소유하려는 욕망에 드리워졌던 죄의 그늘은 사라졌다.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더 쓸 수 있는 물건을 버리면서 죄책감이나 미안한 마음을 갖는 현대인은 거의 없다. “내 돈 내 맘대로 쓰는 데 남이 무슨 상관이냐?”, “있는 사람들이 펑펑 써 줘야 가난한 것들에게도 떨어지는 게 있다” 등의 말들이, 지름신교의 교리를 알기 쉽게 전달하는 대중적 기도문이다.
신은 언제나 영생불멸, 전지전능, 지고지선의 속성을 갖춘 존재였다. 그런데 현대의 지름신은 이들 중 ‘지고지선’이라는 거추장스러운 권능을 떼어내 버렸다. 이 신은 헌금하는 자에게 헌금하는 만큼만 은총을 베푸는 ‘공평한’ 신이다. 지름신교의 신자들에게 다른 신들이 금기시했던 탐욕, 사치, 오만 등은 더 이상 ‘악덕’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자기 사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교리에 합당한 ‘합리적’ 행위이다.
사익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현대의 ‘지름신교’ 교도들에게 천벌은 무의미하다. 그들에게는 ‘공동체’나 ‘공익’을 전제로 구축된 ‘죄악’에 대한 개념조차 없다. 지름신교의 교세가 커지는 만큼 모든 것, 심지어 공동체가 위임한 권력까지 사유화하여 사익을 극대화하려는 파렴치한 욕망이 자리 잡을 공간은 더 넓어질 것이다. 공동체의 파멸을 막고, 지름신에게 버림받은 가여운 영혼들에게 안식할 처소를 마련해 주기 위해서는, 이 ‘사이비 종교’와 결별할 방도를 찾아야 한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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