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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암호 화폐 열풍이 가장 거센 나라가 우리다. 10대 암호 화폐 거래소 중 3곳이 한국에 있다

2008년 '나카모토 사토시'라는 가명을 쓰는 인물이 디지털사(史)에 남을 논문을 발표했다. 분산형 화폐 알고리즘에 관한 것이었다. 불특정 다수가 네트워크로 연결해 새로운 디지털 화폐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글로벌 금융 위기의 한복판이었다. 그는 "중앙은행이 화폐가치를 지켜줄 것이란 믿음은 배신당했다"고 썼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비트코인이다. 최초의 암호 화폐는 반(反)정부 저항 정신의 산물이었다. '나카모토'의 정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비트코인의 '정체' 역시 처음부터 논란을 불렀다. 화폐냐 아니냐부터가 문제였다. 일반 화폐는 정부와 중앙은행이 최종 지급 책임을 진다. 비트코인은 발행 주체도, 보증 기관도 없다. 대신 집단 네트워크가 신뢰성을 보장한다. 수많은 개인의 디지털 장부에 기록해 위조·변조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원리다. 금융의 집단 지성이 작동하자 열광적 신도(信徒)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들은 비트코인이 세계 공용 화폐로 등극한다고 믿는다. 달러며 유로화를 밀어낸다는 것이다. 



▶비트코인이 히트하자 유사 암호 화폐가 1200여 종 나왔다. 어느 것도 화폐로서 역할은 아직 미미하다. 암호 화폐로 결제되는 상점은 얼마 되지 않는다. 가격 변동이 극심해 안정성도 떨어진다. 범죄 조직만 애용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해킹이나 마약·도박 조직이 비트코인 지불을 요구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각국 정부는 암호 화폐에 신중한 자세다. '돈'이 아니라 디지털 상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피라미드 사기'에까지 비유했다. 

▶그런데도 암호 화폐 값이 급등하는 것은 희소성 때문이다. 비트코인은 발행 총량이 2100만개로 정해져 있다. 광물처럼 '채굴'이 진행될수록 품귀를 빚을 수밖에 없다. 화폐라기보다 금 같은 희귀 자산에 가깝다. 투기 심리도 작용한다. 값이 오를 것이란 기대감에 '묻지 마 투자' 열풍이 불고 있다. 하루 새 20~30%씩 오르고 내리기가 예사다. 급기야 비트코인 값이 1만달러에 근접했다. 암호 화폐 전체 시가총액은 삼성전자를 넘은 지 오래다. 글로벌 기업 10위 규모까지 불었다. 

▶암호 화폐 열풍이 가장 거센 나라가 우리다. 10대 암호 화폐 거래소 중 3곳이 한국에 있다. 거래량 세계 1위도 한국 거래소다. 금융도, 디지털도 모르는 일반인들이 거래소에 몰리고 있다. 기업 내용은 보지도 않던 '닷컴 버블' 때의 판박이다. 다들 암호 화폐가 난해하다고 한다. 그 복잡한 알고리즘을 이해하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공격적 베팅을 주저하지 않는다. 위험을 겁내지 않는 한국인의 투기 DNA가 발휘된 듯하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