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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컴컴하고 꽉 막힌 돌 속의 음과 흙 속의 리듬을 어떻게 밝은 세상에 꺼냈을까.

대나무는 들은 이야기가 워낙 많아서 한나절이면 피리가 된다. 가죽은 가슴 칠 일이 많아서 하룻저녁에 북이 된다. 나무는 저도 말 좀 해보자고 신새벽 골라 가야금이나 거문고가 된다. 쇠는 무시로 손들고 나오며 징이 되고 꽹과리가 된다. 쟁쟁쟁, 쇠한테 지고 싶지 않은 돌들이 편경이 된다.


2. 이 흙덩이는 뭐냐, 떡시루 같은!

저울추 같은!

(늙은 흙이 답한다) 오래전에 묻혔으나
썩지 않은 말들이 일어나 불속으로 간다,

눈 못 감는 혼백, 잠 없는 귀신들이

훈(壎)이 된다,

부(缶)가 된다.



공자님 앞이나

종묘로 가서 이쪽저쪽 잘 통하는

언어가 된다. - 윤제림(1960~)

[경향시선]우리나라 악기


편경이나 훈, 부 같은 악기를 만든 이들은 돌이나 흙에도 음악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바람이 들어갈 틈 없는 그 속에서 어떻게 움직이는 힘과 소리와 리듬을 찾아내고 귀를 기울였을까. 컴컴하고 꽉 막힌 돌 속의 음과 흙 속의 리듬을 어떻게 밝은 세상에 꺼냈을까.

오카리나처럼 흙을 구워 구멍을 뚫은 훈(壎)은 작은 항아리 모양의 주둥이에 바람을 불고 다섯개의 구멍으로 음을 조절하는 관악기이다. 흙 속에 숨어 있는 길들을 찾아 바람이 드나들 길을 만들고 음악이 마음껏 춤추게 한 이는 누구인가.

돌과 흙도 악기가 되니, 세상에 음악이 깃들지 않을 사물은 없겠구나. 땅속에 묻힌 이들이 다 하지 못한 말들, 육신은 썩은 후 오랜 세월이 지나도 썩지 않는 말들도 무덤에서 나와 음이 되고 리듬이 되어 이승을 마음껏 돌아다니고 싶을 것이다. 그 말에 불길을 입히고 구멍을 뚫어 음악이 되게 하니 그 울림이 어떠하겠는가.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