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1일 11시에 1차대전 종전되다
영국을 비롯한 영연방 국가에서 11월 11일의 의미는 사뭇 다르다. 추모의 날이다. 영국을 비롯해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영연방국가에선 이날이 종전기념일(Armistice Day)이다. 1914년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 11월 11일에 끝났다.
당시 영국은 1차대전 종결 시간을 그리니치 표준시로 오전 11시로 맞췄다. 11월 11일 11시다. 영 연방 지역에선 이를 11번째 달, 11번째 날, 11번째 시간(Eleventh Month, Eleventh Day, Eleventh Hour)이라고 말한다. 11이 세 차례나 겹치도록 한 것은 두고두고 기억하기 쉽게 할 목적이었다. 영연방에선 종전기념일이 공휴일이 아니다. 대신 이 날과 가장 가까운 일요일을 ‘현충 일요일(Remembrance Sunday)’이라 부르며 추모의 날로 삼는다. 런던에선 이날 오전 11시 시내 한복판에 있는 전몰장병 추념비인 ‘세너타프(Cenotaph)’ 앞에서 국가 공식 추념식을 연다. 이 행사는 BBC방송에 의해 전국에 생중계된다.

epa06318182 A wooden cross is placed at the Field of Remembrance at Westminster Abbey in central London, Britain, 09 November 2017. Crosses and poppies are place in the grounds of Westminster Abbey to remember those who have died during wars. The poppy symbolizes the flowers which grew on French and Belgian battlefields following World War I. EPA/NEIL HALL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11월 11일은 영국과 영연방에선 전몰장병 추모의 날, 미국에선 재향군인의 날이다
군주(올해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건강 문제로 즉위 뒤 처음으로 불참한다)와 왕족, 정부 고위 인사, 정치인이 참가하지만, 주인공은 따로 있다. 참전용사와 유가족이다. 행사는 2분간의 묵념으로 시작해 조포를 발사한 다음 군주와 왕실가족들에 이어 과거 영국과 함께 전쟁을 치렀던 영연방국가 대표들의 헌화가 이어진다.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그다음이다. 왕실 가족이 세너타프 옆 외교부 베란다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영국이 치른 여러 전쟁의 참전 군인들과 전사자 유가족들이 차례로 그 앞을 행진한다. 추모 행사의 핵심이다. 휠체어를 타고 등장하는 참전용사의 가슴에 달린 훈장이 어떤 땀과 파의 희생을 상징하는지를 새기는 순간이다. 공동체를 위한 전쟁터에서 가족을 보낸 유가족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세너타프는 런던에만 있지 않다. 영국 지역과 영연방 각지에 있다. 영국뿐 아니라 과거 함께 전쟁을 치렀던 모든 나라의 전몰장병을 동시에 기린다. 시차에 따라 시간은 다르지만, 각국은 그 나라의 11월 11일 11시에 추념식을 연다.
독특한 것은 따로 현충일이 있는 미국에서도 1954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의해 이날이 ‘재향군인의 날(Veterans Day)’이 됐다는 점이다. 전쟁에 참전했거나 군에서 복무했던 모든 재향군인을 기린다. 공동체를 위한 희생을 되새기는 날이다.
캐나다 트뤼도 총리의 가슴에서 빨간 꽃이 빛난다
추모는 이날 하루에 그치지 않는다. 이날을 전후한 몇 주 동안 영국과 영연방국가에선 빨간 꽃이 거리를 채운다. 정치인, 군인, 공직자는 물론 연예인과 일반인까지 상당수가 가슴에 빨간 꽃을 달고 다니며 전몰장병을 추모하기 때문이다. 영국 왕실 가족과 정치인, BBC 뉴스 프로그램 진행자는 물론 캐나다의 쥐스탱 트뤼도 총리의 가슴에도 이 빨간 꽃이 빛나고 있다. 영어로는 포피(Poppy)라고 부르는 개양귀비꽃 조화다. 양귀비꽃과 식물학적으로 가깝지만, 진통성분은 없다. 관상용으로 재배한다.
이 꽃은 1차대전 당시 치열한 참호전이 벌어져 수많은 전사자를 냈던 벨기에와 프랑스 동북부 플랑드르 지방에서 흔했다. 당시 참전 장병은 참호 주변에서 하늘거리는 이 작고 빨간 꽃을 보며 위안으로 삼았을 것이다. 캐나다군 군의관으로 참전했다가 자신도 전사한 시인 존 맥크래(1872~1918)가 1915년 전사한 동료 장교를 애도하며 쓴 ‘플랜더스 들판에서(In Flanders Fields)’라는 진중시가 널리 애송되면서 포피는 전몰장병을 추모하는 상징적인 꽃으로 자리 잡았다. ‘플랜더스 들판에 포피 꽃이 피었다. 줄줄이 늘어선 십자가 사이로’로 시작하는 추모시는 영연방에서 중등학교에 다닌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역사적 비극을 반복하지 않도록 학교에서부터 끊임없이 가르쳤기 때문이다.

epa06318183 Little crosses are displayed at the Field of Remembrance at Westminster Abbey in central London, Britain, 09 November 2017. Crosses and poppies are place in the grounds of Westminster Abbey to remember those who have died during wars. The poppy symbolizes the flowers which grew on French and Belgian battlefields following World War I. EPA/NEIL HALL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11월 11일 전후해 영국과 영연방에선 가슴에 빨간 꽃 ‘포피’를 단다
왕족, 정치인, 공직자, 연예인 등 스스로 공동체를 위해 봉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을이 오면 가슴에 빨간 포피 조화를 달고 다닌다. 심지어 퍼브서도 카운터에 쌓아놓는다. 그 앞에 작은 저금통이 있어 각자 알아서 성의를 표시하고 포피 조화를 가져간다. 자연스럽게 젊은이들도 포피 달기에 동참할 수 있다. 저금통에 모인 판매수익금은 전몰장병 추모사업과 유가족 돕기에 사용된다. 추모행사가 오랜 세월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포피 만들기는 자원봉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50년 이상 포피 조화를 손수 만들어 배급한 노인이 훈장을 받기도 했다. 30년간 이를 만들다 은퇴한 할머니를 인터뷰한 기사가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등장한다. 공동체와 국가를 위해 희생한 전몰장병을 100년이 지나도 잊지 않는 전통은 세계의 모범이다.

epa06318171 A former soldier places a cross at the Field of Remembrance at Westminster Abbey in central London, Britain, 09 November 2017. Crosses and poppies are place in the grounds of Westminster Abbey to remember those who have died during wars. The poppy symbolizes the flowers which grew on French and Belgian battlefields following World War I. EPA/NEIL HALL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전선 참호에 만발했던 ‘포피’, 공동체 통합의 상징이 됐다
사실 이 작은 포피는 복잡한 영국을 한 나라로 유지하는 데 기여해왔다. 영국은 한 나라가 아니라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로 이뤄진 ‘복합 왕국’이다. 잉글랜드는 1282년 군사력을 동원해 웨일스를 점령했으며 1536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는 웨일스법을 만들어 법적, 제도적으로 흡수했다. 아일랜드도 1172년 헨리 2세가 점령했으며 1534년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형식적인 아일랜드 왕국을 세워 잉글랜드의 국왕이 다스리도록 제도화했다. 아일랜드 남부는 1919년 독립을 선언하고 떨어져 나갔지만, 북부는 영국에 충성하는 국교도와 반대하는 가톨릭의 갈등이 남아있다. 스코틀랜드는 1603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후손 없이 세상을 떠나 튜더 왕가가 단절되자 스튜어트 왕가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즉위해 오랫동안 동군연합(다른 나라지만 군주는 같은 관계)을 유지했다. 그러다 잉글랜드의 식민지 개척과 무역사업 이권을 탐낸 스코틀랜드인들이 1708년 연합법을 만들어 자치를 인정받는 조건으로 ‘그레이트브리튼’이라는 한 나라로 통합했다. 이후 1999년 292년 만에 스코틀랜드 의회가 부활했으며 2014년에는 분리독립에 대한 주민투표가 진행됐으나 부결됐다.
역사가 이렇게 복잡하다 보니 지역색은 상상을 초월한다. 종교적으로 성공회·장로교·가톨릭으로 나뉜다. 정치적으로도 좌우가 첨예하게 대립한다. 영국을 한 나라로 유지하는 일은 보통이 아니다. 하지만 해마다 가을이면 포피를 가슴에 달고 전몰장병 추모에 나서는 일은 지역·종교·정파가 따로 없다. 1차대전은 연합군 4300만 명, 추축군 2500만 명 등 6800만 명 이상이 징집돼 1000만 명 가까이 전사한 살육의 역사다. 군인 2400만과 민간인 5000만 명이 희생된 제2차 세계대전에 이은 인류사의 대참극이다.

epa06318011 Britain's Prince Harry speaks to members of the armed forces and their and relatives during his visit to the Field of Remembrance at Westminster Abbey in central London, Britain, 09 November 2017. Crosses and poppies are place in the grounds of Westminster Abbey to remember those who have died during wars. The poppy symbolizes the flowers which grew on French and Belgian battlefields following World War I. EPA/NEIL HALL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비극을 기억하고 추모함으로써 오히려 미래를 열 수 있다
전쟁이 끝나고도 영국을 비롯한 유럽은 한동안 비관주의가 판치는 우울한 시대를 보냈다. 사람들은 전사자·행방불명자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거리의 상이용사들은 살아있는 비극의 표상이었다. 교육과 취업, 결혼을 미루고 전쟁터에 갔다 온 귀환 병사들은 '잃어버린 세대’로 불렸다. 일부 참전용사는 ‘포탄 쇼크’에 시달렸다. 오늘날 ‘외상후증후군’이라고 불리는 정신질환이다. 돌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전쟁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일부는 향락에 취해 비극을 잊으려고 했다. ‘벨레포크’라고 불리는 퇴폐의 전후 시대는 비극을 잊기 위한 ‘한 잔’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희생자들을 기억함으로써 비극을 잊고 미래를 개척하려고 노력했다. 포피가 등장해 지금까지 이어지는 이유다. 이런 비극을 온 국민이 함께 손잡고 극복했던 기억이 국가·국민 통합을 위한 강력한 끈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겠다. 추모는 공동체가 비극을 딛고 미래로 나아가는 길이다. 내년이면 1차대전 종전 100주년을 맞는다.

epa06318010 Britain's Prince Harry speaks to members of the armed forces and their and relatives during his visit to the Field of Remembrance at Westminster Abbey in central London, Britain, 09 November 2017. Crosses and poppies are place in the grounds of Westminster Abbey to remember those who have died during wars. The poppy symbolizes the flowers which grew on French and Belgian battlefields following World War I. EPA/NEIL HALL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힘으로 패자에 보복하면 역풍 분다는 교훈을 얻는 날이다
글로벌 단위로 벌어졌던 1차대전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War to End All Wars)'이라는 별명이 있다. 하지만 승자의 일방적인 보복성 전후처리로 불씨를 남겨 2차대전을 불러왔다. 힘만으로 국제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준엄한 교훈이다. 힘은 지혜를 수반해야 비로소 유용한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닐까. 이겼다고 정의를 독점한 듯 기고만장하거나 패자에 대한 보복에 나서는 것이 어떠한 역풍을 부르는지에 대한 준엄한 경고도 느껴진다. 이는 국제정치와 국내정치 모두에 적용된다. 인생살이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국과 전 세계에서 11월 11일은 부산 유엔묘지 향해 전몰장병 추모하는 날이다
11월 11일은 영연방국가인 캐나다의 6·25전쟁 참전용사인 빈스 커트니의 제안으로 한국에도 의미 있는 날이 됐다. 2007년부터 ‘턴 투워드 부산(Turn Toward Busan)’이라는 6·25전쟁 국제 추모행사가 됐다. 부산은 세계 유일의 유엔묘지가 있는 도시다. 이곳에는 6·25전쟁에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가 목숨을 잃은 전사자들의 일부(미국을 비롯한 상당수 국가는 본국으로 유해를 모셔갔다)가 묻혀 있다. 전 세계에서 부산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려 전몰장병을 추모하는 의미 있는 행사다. 역시 11월 11일 11시에 행사가 열린다. 우리도 여기에 맞춰 포피처럼 가슴에 뭔가 상징적인 것을 가슴에 달아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연말에 사랑의 열매를 달 듯이 말이다.
영국인과 영연방 사람들은 왜 가을이면 가슴에 빨간 꽃을 다는지 곰곰 생각해봐야 할 때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국가와 국민, 지역과 주민 공동체의 평화와 번영은 전몰장병의 희생이 밑거름됐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나라를 위해 애쓰고 목숨까지 바친 분들을 추모하며 우리 사회의 전통과 미래를 되돌아보는 것은 국가나 공동체의 통합을 위해 필요하다. 이 진리는 나라와 시대를 넘어 변치 않는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중앙일보
영국을 비롯한 영연방 국가에서 11월 11일의 의미는 사뭇 다르다. 추모의 날이다. 영국을 비롯해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영연방국가에선 이날이 종전기념일(Armistice Day)이다. 1914년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 11월 11일에 끝났다.
당시 영국은 1차대전 종결 시간을 그리니치 표준시로 오전 11시로 맞췄다. 11월 11일 11시다. 영 연방 지역에선 이를 11번째 달, 11번째 날, 11번째 시간(Eleventh Month, Eleventh Day, Eleventh Hour)이라고 말한다. 11이 세 차례나 겹치도록 한 것은 두고두고 기억하기 쉽게 할 목적이었다. 영연방에선 종전기념일이 공휴일이 아니다. 대신 이 날과 가장 가까운 일요일을 ‘현충 일요일(Remembrance Sunday)’이라 부르며 추모의 날로 삼는다. 런던에선 이날 오전 11시 시내 한복판에 있는 전몰장병 추념비인 ‘세너타프(Cenotaph)’ 앞에서 국가 공식 추념식을 연다. 이 행사는 BBC방송에 의해 전국에 생중계된다.

epa06318182 A wooden cross is placed at the Field of Remembrance at Westminster Abbey in central London, Britain, 09 November 2017. Crosses and poppies are place in the grounds of Westminster Abbey to remember those who have died during wars. The poppy symbolizes the flowers which grew on French and Belgian battlefields following World War I. EPA/NEIL HALL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11월 11일은 영국과 영연방에선 전몰장병 추모의 날, 미국에선 재향군인의 날이다
군주(올해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건강 문제로 즉위 뒤 처음으로 불참한다)와 왕족, 정부 고위 인사, 정치인이 참가하지만, 주인공은 따로 있다. 참전용사와 유가족이다. 행사는 2분간의 묵념으로 시작해 조포를 발사한 다음 군주와 왕실가족들에 이어 과거 영국과 함께 전쟁을 치렀던 영연방국가 대표들의 헌화가 이어진다.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그다음이다. 왕실 가족이 세너타프 옆 외교부 베란다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영국이 치른 여러 전쟁의 참전 군인들과 전사자 유가족들이 차례로 그 앞을 행진한다. 추모 행사의 핵심이다. 휠체어를 타고 등장하는 참전용사의 가슴에 달린 훈장이 어떤 땀과 파의 희생을 상징하는지를 새기는 순간이다. 공동체를 위한 전쟁터에서 가족을 보낸 유가족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세너타프는 런던에만 있지 않다. 영국 지역과 영연방 각지에 있다. 영국뿐 아니라 과거 함께 전쟁을 치렀던 모든 나라의 전몰장병을 동시에 기린다. 시차에 따라 시간은 다르지만, 각국은 그 나라의 11월 11일 11시에 추념식을 연다.
독특한 것은 따로 현충일이 있는 미국에서도 1954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의해 이날이 ‘재향군인의 날(Veterans Day)’이 됐다는 점이다. 전쟁에 참전했거나 군에서 복무했던 모든 재향군인을 기린다. 공동체를 위한 희생을 되새기는 날이다.
캐나다 트뤼도 총리의 가슴에서 빨간 꽃이 빛난다
추모는 이날 하루에 그치지 않는다. 이날을 전후한 몇 주 동안 영국과 영연방국가에선 빨간 꽃이 거리를 채운다. 정치인, 군인, 공직자는 물론 연예인과 일반인까지 상당수가 가슴에 빨간 꽃을 달고 다니며 전몰장병을 추모하기 때문이다. 영국 왕실 가족과 정치인, BBC 뉴스 프로그램 진행자는 물론 캐나다의 쥐스탱 트뤼도 총리의 가슴에도 이 빨간 꽃이 빛나고 있다. 영어로는 포피(Poppy)라고 부르는 개양귀비꽃 조화다. 양귀비꽃과 식물학적으로 가깝지만, 진통성분은 없다. 관상용으로 재배한다.
이 꽃은 1차대전 당시 치열한 참호전이 벌어져 수많은 전사자를 냈던 벨기에와 프랑스 동북부 플랑드르 지방에서 흔했다. 당시 참전 장병은 참호 주변에서 하늘거리는 이 작고 빨간 꽃을 보며 위안으로 삼았을 것이다. 캐나다군 군의관으로 참전했다가 자신도 전사한 시인 존 맥크래(1872~1918)가 1915년 전사한 동료 장교를 애도하며 쓴 ‘플랜더스 들판에서(In Flanders Fields)’라는 진중시가 널리 애송되면서 포피는 전몰장병을 추모하는 상징적인 꽃으로 자리 잡았다. ‘플랜더스 들판에 포피 꽃이 피었다. 줄줄이 늘어선 십자가 사이로’로 시작하는 추모시는 영연방에서 중등학교에 다닌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역사적 비극을 반복하지 않도록 학교에서부터 끊임없이 가르쳤기 때문이다.

epa06318183 Little crosses are displayed at the Field of Remembrance at Westminster Abbey in central London, Britain, 09 November 2017. Crosses and poppies are place in the grounds of Westminster Abbey to remember those who have died during wars. The poppy symbolizes the flowers which grew on French and Belgian battlefields following World War I. EPA/NEIL HALL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11월 11일 전후해 영국과 영연방에선 가슴에 빨간 꽃 ‘포피’를 단다
왕족, 정치인, 공직자, 연예인 등 스스로 공동체를 위해 봉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을이 오면 가슴에 빨간 포피 조화를 달고 다닌다. 심지어 퍼브서도 카운터에 쌓아놓는다. 그 앞에 작은 저금통이 있어 각자 알아서 성의를 표시하고 포피 조화를 가져간다. 자연스럽게 젊은이들도 포피 달기에 동참할 수 있다. 저금통에 모인 판매수익금은 전몰장병 추모사업과 유가족 돕기에 사용된다. 추모행사가 오랜 세월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포피 만들기는 자원봉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50년 이상 포피 조화를 손수 만들어 배급한 노인이 훈장을 받기도 했다. 30년간 이를 만들다 은퇴한 할머니를 인터뷰한 기사가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등장한다. 공동체와 국가를 위해 희생한 전몰장병을 100년이 지나도 잊지 않는 전통은 세계의 모범이다.

epa06318171 A former soldier places a cross at the Field of Remembrance at Westminster Abbey in central London, Britain, 09 November 2017. Crosses and poppies are place in the grounds of Westminster Abbey to remember those who have died during wars. The poppy symbolizes the flowers which grew on French and Belgian battlefields following World War I. EPA/NEIL HALL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전선 참호에 만발했던 ‘포피’, 공동체 통합의 상징이 됐다
사실 이 작은 포피는 복잡한 영국을 한 나라로 유지하는 데 기여해왔다. 영국은 한 나라가 아니라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로 이뤄진 ‘복합 왕국’이다. 잉글랜드는 1282년 군사력을 동원해 웨일스를 점령했으며 1536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는 웨일스법을 만들어 법적, 제도적으로 흡수했다. 아일랜드도 1172년 헨리 2세가 점령했으며 1534년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형식적인 아일랜드 왕국을 세워 잉글랜드의 국왕이 다스리도록 제도화했다. 아일랜드 남부는 1919년 독립을 선언하고 떨어져 나갔지만, 북부는 영국에 충성하는 국교도와 반대하는 가톨릭의 갈등이 남아있다. 스코틀랜드는 1603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후손 없이 세상을 떠나 튜더 왕가가 단절되자 스튜어트 왕가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즉위해 오랫동안 동군연합(다른 나라지만 군주는 같은 관계)을 유지했다. 그러다 잉글랜드의 식민지 개척과 무역사업 이권을 탐낸 스코틀랜드인들이 1708년 연합법을 만들어 자치를 인정받는 조건으로 ‘그레이트브리튼’이라는 한 나라로 통합했다. 이후 1999년 292년 만에 스코틀랜드 의회가 부활했으며 2014년에는 분리독립에 대한 주민투표가 진행됐으나 부결됐다.
역사가 이렇게 복잡하다 보니 지역색은 상상을 초월한다. 종교적으로 성공회·장로교·가톨릭으로 나뉜다. 정치적으로도 좌우가 첨예하게 대립한다. 영국을 한 나라로 유지하는 일은 보통이 아니다. 하지만 해마다 가을이면 포피를 가슴에 달고 전몰장병 추모에 나서는 일은 지역·종교·정파가 따로 없다. 1차대전은 연합군 4300만 명, 추축군 2500만 명 등 6800만 명 이상이 징집돼 1000만 명 가까이 전사한 살육의 역사다. 군인 2400만과 민간인 5000만 명이 희생된 제2차 세계대전에 이은 인류사의 대참극이다.

epa06318011 Britain's Prince Harry speaks to members of the armed forces and their and relatives during his visit to the Field of Remembrance at Westminster Abbey in central London, Britain, 09 November 2017. Crosses and poppies are place in the grounds of Westminster Abbey to remember those who have died during wars. The poppy symbolizes the flowers which grew on French and Belgian battlefields following World War I. EPA/NEIL HALL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비극을 기억하고 추모함으로써 오히려 미래를 열 수 있다
전쟁이 끝나고도 영국을 비롯한 유럽은 한동안 비관주의가 판치는 우울한 시대를 보냈다. 사람들은 전사자·행방불명자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거리의 상이용사들은 살아있는 비극의 표상이었다. 교육과 취업, 결혼을 미루고 전쟁터에 갔다 온 귀환 병사들은 '잃어버린 세대’로 불렸다. 일부 참전용사는 ‘포탄 쇼크’에 시달렸다. 오늘날 ‘외상후증후군’이라고 불리는 정신질환이다. 돌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전쟁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일부는 향락에 취해 비극을 잊으려고 했다. ‘벨레포크’라고 불리는 퇴폐의 전후 시대는 비극을 잊기 위한 ‘한 잔’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희생자들을 기억함으로써 비극을 잊고 미래를 개척하려고 노력했다. 포피가 등장해 지금까지 이어지는 이유다. 이런 비극을 온 국민이 함께 손잡고 극복했던 기억이 국가·국민 통합을 위한 강력한 끈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겠다. 추모는 공동체가 비극을 딛고 미래로 나아가는 길이다. 내년이면 1차대전 종전 100주년을 맞는다.

epa06318010 Britain's Prince Harry speaks to members of the armed forces and their and relatives during his visit to the Field of Remembrance at Westminster Abbey in central London, Britain, 09 November 2017. Crosses and poppies are place in the grounds of Westminster Abbey to remember those who have died during wars. The poppy symbolizes the flowers which grew on French and Belgian battlefields following World War I. EPA/NEIL HALL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힘으로 패자에 보복하면 역풍 분다는 교훈을 얻는 날이다
글로벌 단위로 벌어졌던 1차대전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War to End All Wars)'이라는 별명이 있다. 하지만 승자의 일방적인 보복성 전후처리로 불씨를 남겨 2차대전을 불러왔다. 힘만으로 국제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준엄한 교훈이다. 힘은 지혜를 수반해야 비로소 유용한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닐까. 이겼다고 정의를 독점한 듯 기고만장하거나 패자에 대한 보복에 나서는 것이 어떠한 역풍을 부르는지에 대한 준엄한 경고도 느껴진다. 이는 국제정치와 국내정치 모두에 적용된다. 인생살이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국과 전 세계에서 11월 11일은 부산 유엔묘지 향해 전몰장병 추모하는 날이다
11월 11일은 영연방국가인 캐나다의 6·25전쟁 참전용사인 빈스 커트니의 제안으로 한국에도 의미 있는 날이 됐다. 2007년부터 ‘턴 투워드 부산(Turn Toward Busan)’이라는 6·25전쟁 국제 추모행사가 됐다. 부산은 세계 유일의 유엔묘지가 있는 도시다. 이곳에는 6·25전쟁에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가 목숨을 잃은 전사자들의 일부(미국을 비롯한 상당수 국가는 본국으로 유해를 모셔갔다)가 묻혀 있다. 전 세계에서 부산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려 전몰장병을 추모하는 의미 있는 행사다. 역시 11월 11일 11시에 행사가 열린다. 우리도 여기에 맞춰 포피처럼 가슴에 뭔가 상징적인 것을 가슴에 달아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연말에 사랑의 열매를 달 듯이 말이다.
영국인과 영연방 사람들은 왜 가을이면 가슴에 빨간 꽃을 다는지 곰곰 생각해봐야 할 때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국가와 국민, 지역과 주민 공동체의 평화와 번영은 전몰장병의 희생이 밑거름됐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나라를 위해 애쓰고 목숨까지 바친 분들을 추모하며 우리 사회의 전통과 미래를 되돌아보는 것은 국가나 공동체의 통합을 위해 필요하다. 이 진리는 나라와 시대를 넘어 변치 않는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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